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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기획>사람과 기업

‘미국의 길’ 암웨이 세계 유통의 큰길 되다

  • (2018-02-23 10:32)


암웨이는 1959년 리치 디보스(Rich DeVos)와 제이 밴 앤델(Jay Van Andel)이라는 젊은이의 의기투합으로 설립됐다. ‘미국의 길’을 지칭하는 이름뿐만 아니라 회사의 이념과 사업방식도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암웨이의 성공요인으로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마케팅”을 꼽는다. 두 젊은이가 상상했던 꿈은 세계 각국으로 전파됐고 이제 암웨이는 전 세계 직접판매산업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발돋움하는 중이다.


밴 앤델과 디보스의 만남

▷ 젊은 시절 리치 디보스(사진 왼쪽)와 제이 밴 앤델

리치 디보스와 제이 밴 앤델은 1940년 미시건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처음 만났다. 디보스가 밴 앤델에게 등하굣길에 자신을 태워주는 대신 매주 25센트씩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카풀은 암웨이를 설립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됐다.

이들의 첫 번째 사업은 또 다른 고교 동창생과 설립한 ‘월버린 에어 서비스’이다. 전세기로 여객을 수송하거나 비행 기술을 가르치는 회사였다. 18개월 후 동업을 하던 친구가 이들에게 지분을 팔아 이 회사는 디보스와 밴 앤델 두 사람의 회사가 됐다. 그러던 중 뉴트리라이트의 디스트리뷰터로 활동하던 친척에게서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시카고 호텔에서 가졌던 미팅에서 큰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뉴트리라이트 프로덕츠’에 걸기로 했다.

뉴트리라이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기업으로 ‘뉴트리라이트 프로덕츠 인 코퍼레이션(제품을 제조하는 회사)’과 ‘마이팅거 앤드 캐셀베리(디스트리뷰터 조직을 운영)’로 나뉘어져 있었다.


미국인의 꿈 암웨이의 탄생 

▷ 미시건주 에이다(Ada)에 암웨이 코퍼레이션

밴 앤델과 디보스는 뉴트리라이트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 두 계열사가 서로 양립해 전면적인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자신들의 사업에 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1959년 미시건주 에이다(Ada)에 암웨이 코퍼레이션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암웨이(Amway)란 ‘America Way’의 약자로 말 그대로 미국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이렇게 탄생한 암웨이는 ‘암웨이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고, 미국의 꿈을 이어 글로벌의 꿈을 실현시켜가고 있다. 두 사람의 창업자가 이렇다 할 불화 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지금의 규모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밴 앤델과 디보스 두 사람의 두터운 신뢰와 낙관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유명한 동기부여가 지그 지글러는 “암웨이는 믿음과 열린 마음을 가지게 한다. 또 자신이 꿈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고 극찬했다. 미국의 성직자 중 가장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는 “암웨이는 존경과 사랑을 요구하는 회사로 현대 경제사에 있어서 파트너십을 통해 전설적인 성공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단 1명을 위한 420㎞ 주행 

▷ 현 경영진 덕 디보스(사진 왼쪽)와 스티브 밴 앤델

밴 앤델과 디보스는 지속적으로 암웨이에서 판매할 만한 제품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이웃에서 ‘Frisk’라는 클리너를 소개받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암웨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LOC’ 세제의 시초가 됐다. LOC는 코코넛 오일을 주원료로 사용한 농축세제로 ‘Liquid Organic Cleaner(액상 유기농 세제)’의 약자이다. 지금도 SA8(세탁용 세제)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제품이다.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암웨이는 5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지하사무실에서 벗어난 이들은 땅을 매입해 인쇄소와 공장을 지었다. 지금까지 꾸준히 발행되고 있는 암웨이의 사보 <아마그램>도 이때 창간됐다.

▷ 60년대 세일즈 키트


1971년 ‘Center of Free Enterprise’ 착공 이후 리저널 디스트리뷰터 센터, R&D 센터 등 지속적인 확장을 거쳐 지금의 글로벌 본사 캠퍼스로 완성됐다.

두 동업자는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서만 제품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버스를 대절해 먼 곳까지 가서 판매활동을 벌였다.

이른바 ‘홍보를 위한 여행’으로 단 1명의 디스트리뷰터를 위해 420㎞를 달려간 적도 있었다. 이들은 버스에 크게 ‘Showcase’라고 쓰고 미 전역을 누볐다. 


▷ 첫 번째 Showcase Bus(1963년)


승승장구하던 암웨이는 70년대에 암초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암웨이는 피라미드 조직’이라는 기사가 연일 쏟아져 나왔고 결국 FTC(미국 연방통상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조사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의 조사가 있는 중에도 암웨이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5년의 조사를 끝으로 FTC는 “암웨이 사업은 합법적으로 많은 기회를 주는 사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디보스는 “무자본•무경험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막상 두려움과 심한 공포를 느끼지만, 하고 말 것이라는 용기와 신념이 성공의 제1조건”이라며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제이 밴 앤델과 리치 디보스는 90년대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들의 아들인 스티브 밴 앤델(1995년 회장 임명)과 딕 디보스(1993년 사장 임명)가 경영권을 이어 받았다. 현재는 리치 디보스의 막내아들인 덕 디보스(2002년 사장 임명)와 스티브 밴 앤델이 함께 경영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과 사회공헌 


암웨이는 이윤만 창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며 성장해왔다. 지속적인 기반시설 확충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시건 주의 그랜드래피즈에 682개의 룸으로 이루어진 그랜드 플라자 호텔을 세워 미시건 서부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
 

암웨이는 ‘One by One’, ‘Power of 5’, 재난구호, 환경보호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쳐왔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공헌활동은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일례로 지난해 숙환으로 별세한 리치 디보스의 아내인 헬렌 디보스는 자선사업가로 유명하다. 리치 디보스와 1953년 결혼한 이후 일생을 지역 사회에 헌신하며 지냈다. 교회, 병원, 교육기관 및 시민 사회와 함께하는 각종 프로젝트에 부부 명의의 재단을 통해 지속적인 기부를 해왔으며, 한 아동병원에서는 그녀의 헌신을 기리며 병원명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사진 자료: 암웨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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