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돋보기

빙글빙글 세상이야기

끝나지 않은 전쟁

  • (2017-09-15 10:01)

▷ 1950년 12월 4일 촬영된 대동강 철교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통일부 이유진 부대변인은 9월 8일 브리핑을 통해 “9월 9일이나 10월 10일을 전후해 추가 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그간 북한은 김일성 생일, 정권수립일 등 기념일에 맞춰 도발을 감행하는 일이 잦았다. 휴전이 종전이 아닌 만큼 북한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피다

6•25 전쟁은 두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로 벌어졌다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의 야욕으로 인한 전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에 계속해서 남침을 요구했고 직접 모스크바로 2번씩이나 방문하며 전쟁을 주장했다.
 

전쟁 준비로 북한 측은 49년 봄부터 중국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2만 여 명을 흡수했다. 또한 소련에서 박격포, 장갑차, 전투기 등의 무기를 다수 입수하였다. 반면 한국군은 전투기와 전차 모두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을 뿐이었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남한에 군사 지원 시 전쟁이 발발할 것을 염려해 주한 미군을 철수시켰다. 게다가 부정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채병덕이 다시 육군참모장으로 복귀하면서 국군의 지휘체계는 문란해졌다. 친일파 장성들의 부패와 중간급 간부의 압박으로 국군의 사기는 저하됐다. 심지어 장병들 대다수는 ‘모내기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


서울함락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문산, 춘천, 강릉 등의 전선을 제외하고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결국 6•25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서울 함락 뒤 미처 후퇴를 못해 이 3일간 국군 병력은 10만 여 명에서 3만 여 명으로 줄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대전으로 일언반구 없이 피신을 떠났고 입법부, 사법부도 피난 사실을 몰랐다. 이승만의 피난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고위급 관리나 지주, 군경 등은 재빠르게 피신을 했지만 시민들은 그렇지 못하고 뒤늦게 피난행렬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국군은 6월 28일 피난을 오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국군 육군참모장 채병덕의 지휘 아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다리가 끊겨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하지 못했으며 서울에 남겨진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역자로 몰리기도 했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병원은 부상병, 환자의 가족들, 병원을 경비하는 1개 소대 병력이 있었다. 북한군은 이들을 학살하며 환자의 가족들마저 죽였다. 인공치하의 서울은 인민재판이 난립했고, 식량 공출, 강제 부역과 징용 등으로 피폐해졌다.


▷ 인천상륙작전

미군과 UN의 개입

6월 26일 UN 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면서 7월 1일 UN군 참전 결의가 통과됐다. 가장먼저 대응한 것은 미군이었다. 하지만 7월 5일 미군이 투입된 오산전투에 1개 대대만이 투입됐다.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F. 딘은 미군의 투입됐다는 소식을 듣고 남침이 중단되길 바랐으나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러한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7월 14일 작전권이 양도됐고 이때 이양된 작전권을 아직까지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군은 UN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남하해 8월 초 낙동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국군 1개 사단과 미군 1개 사단이 다부통에서 총공세를 감행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다. 미군의 융단폭격에 힘입어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해 낙동강 전성 고착화에 성공하게 된다.


▷ 낙동강 전선에서의 미군


전선이 고착화되자 보급로 문제와 폭격 등으로 북한군의 전투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9월 20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북한군에 전당되면서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한다. 9월 27일 서울 탈환에 성공하고 9월 28일에는 이승만도 서울에 환도한다.
 

10월 1일 동부전선을 돌파하며 38선을 돌파한다. UN군 결의안을 무시한 결행으로 당초 목적은 원래 국경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10월 19일에는 평양까지 차지하고 11월 말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수복했다.


중국군의 개입

10월 중순 이후부터 중공군은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해 11월 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UN군과 국군이 이르렀을 때 인해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군 병력의 3배가 넘는 약 50만 명 규모의 군대로 공격해오자 국군과 UN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물러나게 됐다.
 

아군 측 서부와 동부 전선 병력은 다시 진격해 압록강을 포함한 국경 부근까지 닿았으나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자 전선이 동과 서로 나뉘게 된다. 서부 전선은 중공군에 밀려 급격하게 후퇴하고 동부 전선은 적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된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UN군 사령부는 철수를 지시한다.


해가 바뀌어 1951년 중공군은 3차 공세를 펼친다. 아군은 38선에서 3주 만에 37도선인 평택, 원주, 삼척까지 밀려났다. 3차 공세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6•25전쟁의 이산가족은 대부분 이때 생겼다.


1월 말부터 늘어진 보급선으로 갑자기 중공군이 후퇴하자 UN군은 북진을 해 서울 재탈환을 눈앞에 두게 됐다. 2월 10일 전열을 추스린 중공군이 다시 내려왔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막아내며 UN군은 북진을 재개하여 3월 15일 서울탈환에 성공한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맥아더가 6•25전쟁을 지휘하면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제3차 세계대전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직접 폭격해 중국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4월 퇴임하게 된다.


중공군은 군대를 재정비해 4월 하순 1차 춘계 공세라고도 불리는 5차 공세를 개시했다. 서부 전선을 주 무대로 서울 탈환을 위해 18개 사단이 서울을 공격했다. UN군은 화력을 앞세워 반격해 서울을 사수했다. 5월 중순 동부 전선을 타깃으로 한 전략인 2차 춘계 공세 역시 막히며 중공군은 3만 5,000여 명의 사상사가 발생하는 괴멸적인 인력손실을 겪는다.


정전협상 시작

중국과 미국 양측은 전쟁으로 인한 여론과 부담감이 고조됐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협상에 들어갔다. 미군은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회담 중에도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중국과 북한 측은 형상 중 국지전과 폭격에 휴전 협상을 빠르게 하길 원했지만 소련은 미군의 군사력을 분산시켜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포로 송환 문제도 협상이 길어진데 한 몫을 했다. 공산군 측은 “포로는 적극적 적대 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는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내세워 양측 포로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였다.


반면 유엔군 측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는 제네바 협정의 또 다른 조항을 근거로 내세워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을 주장했다.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전쟁 중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징집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은 포로의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으로 의견을 모았다. 종국에는 1953년 7월 27일 미국과 북한•중국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6•25전쟁은 휴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 저작권자 ⓒ 한국마케팅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목록으로

포토뉴스 더보기

해외뉴스 더보기

식약신문

사설/칼럼 더보기

다이렉트셀링

만평 더보기

업계동정 더보기

세모다 스튜디오

세모다 스튜디오 이곳을 클릭하면 더 많은 영상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날씨

booked.net
+27
°
C
+27°
+22°
서울특별시
목요일, 10
7일 예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