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새로운 시대를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5년도 다단계판매업자 주요 정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고를 보내고 있다. 시장 규모는 4조 5,141억 원으로 전년 대비 소폭 감소한 반면, 등록 업체와 판매원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파이는 줄어드는데 뛰어드는 이들은 많아지는, 이른바 ‘정체 속의 과밀’ 현상이다. 이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현장의 갈증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한다.
특히 업계의 성장을 견인해온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건기식 시장은 이미 6조 원대에 진입하며 대중화됐지만, 온라인몰과 홈쇼핑은 물론 초저가 채널까지 가세하며 유통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제품의 기능성은 평준화되었고 가격은 실시간으로 비교된다. 여기에 현장의 과장 표현을 막기 위한 법적 규제마저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어, 이제 단순히 ‘좋은 원료를 쓴 제품’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마당에 경쟁 업체는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처절한 레드오션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놀라운 효과를 지닌 새로운 건강식품을 찾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시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 세계 경제의 성장축은 AI, 구독 서비스, 디지털 콘텐츠, 온라인 교육, 커뮤니티, 코칭, 데이터 기반 헬스케어와 같은 무형의 상품과 경험으로 이동하고 있다. 소비자는 물건보다 경험을 구매하고, 소유보다 이용을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 다단계판매산업은 여전히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생활용품이라는 유형 상품 중심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현행 방문판매법과 공제 제도는 실물상품 유통을 중심으로 설계된 측면이 강하다. 청약철회와 반품, 소비자피해 보상 등 대부분의 제도 역시 유형 상품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와 구독경제를 기존 제도 안에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적지 않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품목을 하나 더 추가하는 일이 아니다. 산업을 담는 그릇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릇을 바꿀 수 없다면 그릇의 크기라도 획기적으로 키워야 한다. 방문판매법과 공제규정은 특정 상품을 규율하는 법이 아니라 거래 방식과 소비자 보호를 규율하는 법이어야 한다.
소비자 보호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AI 서비스와 디지털 콘텐츠, 교육, 멤버십,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등 새로운 경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제도 역시 진화해야 한다. 유형의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만 보호할 수 있고, 첨단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는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제조합 구성원의 역량 문제로 귀결된다. 모든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어야 공제조합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다단계판매산업은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며 쪼그라든 기존 시장을 나누는 경쟁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장을 품을 수 있는 ‘다단계판매 2.0’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제 필요한 것은 건강기능식품 다음 제품을 찾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산업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비전이다. 그것이 침체된 시장을 다시 성장시키고, 대한민국 다단계판매산업의 미래를 여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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