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240일 허가 시대 열린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식약정보>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통상 10년 이상의 시간과 수천억 원의 비용이 투입된다. 특히 마지막 관문인 허가·심사는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만큼 철저함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그런데 최근 식약처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신약 허가체계 구축”을 선언하면서 제약·바이오업계는 물론 환자단체와 의료계까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식약처는 지난 5월 26일 ‘의료제품 허가·심사 혁신방안’을 발표하고, 신약, 바이오시밀러, 신기술 의료기기의 허가심사를 대폭 단축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6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핵심 목표는 이른바 ‘240일 허가 시대’다. 기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치료제를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의미다.
이번 정책은 단순히 심사기간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국내 바이오산업 경쟁력 강화와 환자 치료 접근성 확대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안전성 검증은 충분한가”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허가심사 혁신의 핵심은 ‘동시·병렬심사’
이번 혁신안의 핵심은 기존 순차형 심사를 병렬형 심사로 바꾸는 데 있다.
기존에는 품질, 안전성, 유효성 등의 자료를 제한된 심사인력이 순차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다 보니 심사 시간이 길어졌고, 업체는 허가 접수 후 수개월이 지나서야 보완 요청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의약품은 접수 후 87일이 지나서야 첫 공식 보완 요청이 이뤄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수의 전담 심사팀이 동시에 자료를 검토한다. 품질팀, 비임상팀, 임상팀, 통계팀, GMP팀 등이 병렬적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식약처는 이를 위해 신규 심사인력 195명을 확충했다고 밝혔다.
가장 큰 변화는 ‘수시 검토·보완 체계’다. 기존에는 업체가 모든 보완사항을 한 번에 통보받았지만, 새 제도에서는 접수 후 25일 시점부터 분야별 검토 의견을 순차적으로 받게 된다. 쉽게 말하면 예전에는 “시험지를 다 채점한 뒤 결과를 알려줬다면”, 이제는 “채점 중간중간 틀린 문제를 먼저 알려주는 방식”으로 바뀌는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한 시간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족한 자료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보완 준비 기간을 줄일 수 있고, 허가 예측 가능성도 높아진다. 특히 바이오벤처 업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약 개발 기업들은 허가 지연이 곧 자금 압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임상 완료 후 허가가 늦어질수록 투자 유치와 상업화 일정도 밀리기 때문이다. 심사기간 단축은 곧 기업 생존과 직결될 수 있다.
시간이 생명인 환자들에게 치료 접근성 확대 기대
허가심사 단축은 환자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다. 특히 희귀질환이나 중증질환 환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신약이 출시되기를 기다린다.
식약처 역시 이번 혁신안의 가장 큰 목적을 “국민 치료기회 확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 분야에서는 허가 시점 자체가 생존율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해외에서는 이미 승인된 약이 국내에서는 수년간 심사 절차를 거치는 동안 환자들이 치료 기회를 놓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역시 이번 정책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내놨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치료가 시급한 환자들에게 허가까지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글로벌 바이오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신속 허가 체계는 국내 환자들에게 최신 치료제를 더 빨리 공급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미국 FDA나 유럽 EMA 역시 혁신 치료제에 대해서는 우선심사, 신속승인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신속심사 체계가 자리 잡으면 글로벌 임상과 허가 전략에서 한국의 위상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해외 제약사 입장에서는 허가 속도가 빠른 국가를 우선 출시 시장으로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식약처가 허가 이전 단계부터 기업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고 밝힌 부분이다. 새롭게 도입되는 ‘허가 신청 전 대면회의(Pre-NDA Meeting)’ 제도는 기업이 신청 전에 자료를 점검받고 보완 방향까지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빨라지는 만큼 커지는 안전성 우려
하지만 허가심사 단축이 무조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역시 안전성 문제다. 신약은 환자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는 만큼 “충분히 검증됐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혁신 치료제라도 부작용이나 장기 안전성 문제가 발견되면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글로벌 제약 역사에서는 신속 승인 이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견돼 시장에서 퇴출된 사례들이 존재한다. 특히 바이오의약품이나 첨단의료기기는 기술 복잡성이 높아 장기 추적관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일각에서는 “허가 속도 경쟁이 과열되면 규제기관 본연의 역할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허가를 목표로 삼는 과정에서 심사의 깊이나 객관성이 흔들릴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식약처는 “속도보다 안전성을 우선하되, 인력 확충과 병렬심사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사 자체를 간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전문가가 동시에 검토해 시간을 줄이겠다는 논리다.
다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다. 신규 인력 195명이 단기간에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심사 품질이 균일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등이 관건이다. 신약 심사는 단순 행정절차가 아니라 독성, 통계, 임상, 제조공정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고난도 업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 측에서도 책임이 커진다. 식약처는 체크리스트 제공과 사전회의 확대를 통해 기업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제출 자료의 완성도는 기업 몫이다. 허가 기간 단축만 기대한 채 충분한 데이터 확보 없이 무리하게 신청에 나설 경우 오히려 보완과 지연이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빠른 허가’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받는 허가’
이번 식약처 혁신안은 국내 규제 시스템의 큰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과거의 허가 체계가 ‘규제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규제 서비스’ 개념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글로벌 바이오 경쟁 환경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최근 각국은 자국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해 허가 속도 경쟁에 나서고 있다. 미국 FDA, 일본 PMDA, 유럽 EMA 모두 혁신 치료제에 대한 패스트트랙 제도를 확대하는 추세다.
한국 역시 글로벌 바이오 강국을 목표로 하는 상황에서 규제 혁신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다. 환자와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허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허가가 빨라졌더라도 안전성 논란이 반복된다면 규제기관 신뢰는 오히려 훼손될 수 있다. 반대로 철저한 검증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성을 높인다면 한국형 허가 모델은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번 혁신안의 성공 여부는 두 가지 균형에 달려 있다.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얼마나 빠르게 높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얼마나 엄격한 안전성 검증을 유지할 수 있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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