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헬스 시장의 숨은 다섯 가지 규칙
<글로벌 헬스&뷰티 시장 분석 62> - 스위스 바이오헬스 시장

스위스는 카카오를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프리미엄 초콜릿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원료가 아닌, 가공과 브랜드 설계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 구조에 기반한다. 스위스 바이오헬스 시장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기술력이 반드시 시장 안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도 누군가는 시장에 안착하고, 누군가는 진입조차 못 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시장 작동 원리’에 있다.
첫 번째 규칙: 허가만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위스 의약품 시장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허가와 시장 접근의 분리된 구조다. 한국은 허가 이후 법적 판매가 가능한 구조로 허가 중심 성격이 강하며, EU는 EMA 승인 이후 각국이 가격과 급여를 별도로 결정한다. 스위스는 허가(스위스의약품청)와 가격·급여(스위스연방보건청)가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분리형 규제 구조’를 갖고 있다. 시판 허가 이후 의약품 유통 자체는 가능하지만, 급여 등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처방과 매출로 이어지기 어렵다. 약가는 9개 참조국 가격(ERP)과 국내 유사 약제 비교(TQV)를 기반으로 산정되며, 3년 주기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출시 초기의 가격 설계가 단기 전략을 넘어 장기 수익 구조를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를 고려한 전략적 설계가 요구된다.
이 같은 구조는 허가 이후 단계에서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급여 등재와 가격 결정이 시장 접근을 좌우하는 만큼, 허가 준비 단계에서부터 이를 동시에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허가 심사 말미에 스위스연방보건청(FOPH/BAG)에 급여 등재를 병행 신청하거나, 한-스위스 GMP 상호인정협정(MRA)을 활용해 현지 실사를 대체함으로써 허가 기간을 단축하는 방식은 단순한 절차상의 효율을 넘어 실제 시장 진입 시점을 앞당기는 전략으로 작용한다.
또한 치료 효과, 비용 대비 효율성, 기존 치료 대비 차별성에 대한 입증 역시 허가 단계와 분리된 과제가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급여 등재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가 함께 평가되기 때문에, 임상 데이터 설계 단계에서부터 급여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두 번째 규칙: CE 인증은 결승선이 아니라 출발선이다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CE 인증을 받으면 스위스 진출이 가능하다’는 단순한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021년 스위스와 EU 간 의료기기 분야 상호인정협정(MRA) 협상이 중단되면서, 스위스는 EU 규제 체계상 제3국으로 재분류됐다. 이로 인해 CE 인증만으로는 스위스 시장 유통이 불가능하며, 별도의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우선 CH-REP(스위스 현지 대리인)을 지정해야 한다. 이는 단순 행정 대행이 아니라 제품 관련 규제 대응과 책임을 함께 부담하는 법적 주체다. 따라서 비용보다는 규제 대응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Swissdamed 등록이 필요하다. 이는 제조사·수입업자·현지 대리인 등 시장 참여자와 제품 정보를 등록하는 스위스 의료기기 통합 관리 시스템으로, 제품 식별과 시판 후 안전관리(PMS)를 위한 기반 인프라다. 제조사, 수입업자, 현지 대리인 등 시장 참여자 등록은 이미 시행 중이며, 제품 등록은 2026년 7월 1일부터 의무화된다. 2026년 말까지는 유예기간이 부여되는 만큼, 제품 데이터와 관련 문서를 사전에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제품 라벨은 독일어·불어·이탈리아어 3개 국어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세 번째 규칙: 유통 파트너는 판로가 아닌 시장 구조 자체다
스위스 바이오헬스 시장에서는 제조사가 병원이나 약국에 직접 공급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제품은 현지 대리인, 수입업체, 유통사를 거쳐 병원·클리닉·약국으로 이어지는 다층 구조를 통해 시장에 공급된다.
이 과정에서 유통 파트너는 단순한 물류 채널을 넘어 가격 형성, 보험 급여 적용, 의료기관 접근성까지 좌우하는 핵심 주체가 된다. 즉, 어떤 파트너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시장 진입 방식과 확장 가능성이 동시에 결정되는 구조다.
설문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확인된다. 응답 기업의 86.4%가 스위스 내 사업화 파트너 확보를 ‘어렵다’ 또는 ‘매우 어렵다’고 응답했으며, 실제 수요 산업·기술, 도입 조건, 레퍼런스 부족이 주요 애로 요인으로 지목됐다. 이는 제품 경쟁력과 별개로, 제품과 시장을 연결하는 핵심 정보 자체가 부족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네 번째 규칙: 네트워크와 레퍼런스가 시장 진입의 전제 조건으로 작동한다
스위스 바이오헬스 시장에서는 공식 제도 외에도 실제 거래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존재한다. 기존 비즈니스 네트워크와 추천을 중심으로 파트너십이 형성되는 관계 중심의 시장 구조다. 한마디로 파트너를 선정할 때 가격 경쟁력보다 과거 공급 이력이나 협업 경험과 같은 레퍼런스가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레퍼런스가 없는 신규 기업은 초기 진입 자체가 쉽지 않다. 기술 경쟁력이 충분하더라도, 이를 검증해줄 네트워크가 없으면 파트너십 형성 단계에서부터 제약이 발생한다.
따라서 스위스 시장은 ‘바로 진입하는 시장’이라기보다 일정 수준의 신뢰와 실적을 전제로 접근해야 하는 시장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인접 EU 시장에서 레퍼런스를 확보하거나, 상업 계약 이전에 PoC(개념 검증)나 파일럿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 기반을 구축하는 전략이 현실적인 진입 경로로 활용된다.
다섯 번째 규칙: 시장 진입 전략은 ‘순서’가 아니라 ‘준비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스위스는 인구 규모만 보면 제한적인 시장이다. 그러나 높은 의료 지출 수준, 정교한 보험 시스템, 글로벌 제약·의료기기 기업이 밀집한 산업 구조를 고려하면 단순한 소비 시장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의료 시장의 구조가 압축된 환경에 가깝다.
이 시장은 ‘진입 순서’보다 ‘준비 수준’에 따라 접근 전략이 달라진다. 특히 의료기기 및 디지털 헬스 분야의 경우, 유럽 시장 진입을 스위스부터 시작하기보다는 독일·프랑스 등 인접 EU 시장에서 초기 레퍼런스를 확보한 이후 확장하는 경로가 현실적이다. EU 내 납품 실적이나 병원 채택 사례가 확보되면 스위스 유통 파트너와의 협상 조건과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도시별로도 전략적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바젤은 글로벌 제약사 본사와 바이오 클러스터가 집중된 지역으로, 신약 개발과 라이선스 협력 중심의 접근이 유효하다. 취리히는 공학 기반 헬스테크, 의료 AI, 로봇 수술 분야 혁신이 집적된 지역으로 의료기기 및 디지털 헬스 기업에 적합하다. 제네바 WHO 등 국제기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진단기기와 공중보건 분야에서 글로벌 레퍼런스를 구축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결국 스위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테스트 시장’이 아니라, 준비 수준에 따라 활용 방식이 달라지는 전략적 시장이다. EU에서 레퍼런스를 축적한 기업에게는 고부가가치 시장으로서의 확장 거점이 되며,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라면 충분히 유효한 진입 목적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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