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가 바꿀 난치병 정복의 미래
<알아두면 쓸모있는 식약정보>

난치병은 오랫동안 ‘치료법이 없는 질환’으로 정의돼 왔다. 그러나 최근 과학기술의 흐름은 이 정의 자체를 바꾸고 있다. 치료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원인을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던 영역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양자컴퓨터가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와 IBM, 이화학연구소가 협력해 구축한 ‘양자 중심 슈퍼컴퓨팅’ 인프라는 난치병 연구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단순한 성능 개선이 아닌, 계산 방식 자체를 재정의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계산의 한계를 넘다
현대 의학이 직면한 대표적 난제 중 하나는 ‘리 증후군(Leigh Syndrome)’이다. 이 질환은 신생아의 미토콘드리아가 정상적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해 대부분 생후 1년 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희귀질환이다.
문제는 병의 원인이 단일 유전자 이상으로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토콘드리아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자 전달 과정은 수많은 단백질과 효소, 그리고 전자의 양자적 상태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힌 ‘초복잡계’다. 특정 돌연변이가 어떻게 전체 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붕괴시키는지 이해하려면, 단순한 생화학 실험을 넘어 양자 수준의 정밀 시뮬레이션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초거대 연산 문제다. 연구진에 따르면 리 증후군의 근본 기전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약 10억 × 10억 규모 행렬의 대각화 연산이 필요하다. 이는 기존 슈퍼컴퓨터로도 수십 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결국, 난치병 연구의 병목은 생물학적 지식 부족이 아니라 연산 능력의 한계였던 셈이다.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양자 중심 슈퍼컴퓨팅’이다.
슈퍼컴퓨터와 양자의 결합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일본의 슈퍼컴퓨터 ‘후가쿠(Fugaku)’와 연세대의 ‘IBM 퀀텀 시스템 원’을 연결한 하이브리드 구조다. 이는 기존 고성능 컴퓨팅(HPC)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전략적 결합이다.
슈퍼컴퓨터는 대규모 데이터 처리와 병렬 연산에 강점을 갖지만, 전자 상태나 분자 상호작용처럼 양자역학적 특성이 중요한 문제에서는 계산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큐비트 기반의 중첩과 얽힘을 활용해 이러한 문제를 훨씬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특히 연세대에 도입된 ‘IBM 퀀텀 시스템 원’은 127큐비트급 ‘이글(Eagle)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하는 초전도 방식 양자컴퓨터다. 큐비트는 기존 비트처럼 0 또는 1의 값만 갖는 것이 아니라,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계산을 병렬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특정 문제에서 기존 슈퍼컴퓨터가 수천 년 걸릴 계산을 수초 내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실제로 2019년에는 53큐비트 양자컴퓨터가 기존 컴퓨팅으로 1만 년이 걸릴 연산을 수백 초 만에 처리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연세대 양자컴퓨팅 센터에 설치된 시스템은 극저온 환경에서 작동한다. 양자 상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주의 온도’에 가까운 극저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단순한 냉각 장비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샹들리에 형태의 정밀한 양자 회로가 배치돼 있다.
이처럼 슈퍼컴퓨터와 양자컴퓨터를 결합한 구조는 단순히 계산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계산의 접근 방식 자체를 바꾸는 기술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바이오산업의 새로운 성장 엔진 부상
제약·바이오산업에서도 양자컴퓨팅이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복잡한 생명현상을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기존 컴퓨팅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신약개발의 속도와 성공 확률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글로벌 바이오헬스 산업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양자컴퓨터는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게 분석하고 패턴을 도출할 수 있어 이미 보건의료 핵심 영역에서 활용 가능성이 검증되고 있다. 특히 신약개발 분야에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전통적인 신약개발은 통상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장기 프로젝트다. 후보물질 탐색부터 전임상·임상시험까지 수많은 단계에서 실패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된다.
양자컴퓨터는 분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을 원자 수준에서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실제 인체 환경과 유사한 조건을 컴퓨터 상에서 구현해 단백질의 3차원 구조와 동적 변화를 예측하고, 약물 후보물질이 특정 표적 단백질에 얼마나 강하게 결합하는지를 높은 정확도로 계산할 수 있다.
이 같은 가능성을 반영하듯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양자컴퓨팅 기업과의 협력을 본격화하고 있다.
독일의 베링거인겔하임은 2021년 구글 퀀텀 AI와 협력해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협업은 컴퓨터 지원 약물 설계(CADD)와 인실리코(In Silico) 연구를 결합한 형태로 약물과 단백질 간 결합을 예측하는 정확도를 크게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스위스의 로슈 역시 같은 해 영국의 케임브리지 양자컴퓨팅과 손잡고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에 나섰다. 양자 알고리즘을 활용해 복잡한 신경퇴행성 질환의 분자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아이온큐, 아마존 웹서비스, 엔비디아와 협력해 양자컴퓨터 기반 화학 반응 분석 실험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기존 수개월이 걸리던 계산을 수일 수준으로 단축하면서도 정확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글로벌 제약사들의 움직임은 양자컴퓨팅이 더 이상 이론적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신약개발 프로세스에 적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시장 전망 역시 긍정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모르도르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양자컴퓨팅 기반 신약개발 시장은 2024년 약 4억 5,000만 달러에서 2030년 8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평균 성장률은 10%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는 아직 초기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성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향후 양자컴퓨터의 성능 개선과 접근성 확대가 이루어질 경우, 시장 규모는 더욱 빠르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양자컴퓨팅은 단순한 기술 트렌드를 넘어, 제약·바이오산업 전반의 경쟁 구도를 바꾸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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