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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세상이야기-미국독립사 (2018-06-29)

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독립전쟁


미국은 독립선언문을 채택한 1776년 7월 4일을 기념해 매년 같은 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그 행사의 규모면에서 미국 최대 행사이자 기념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의 역사 교육 중 독립전쟁에는 상당 수 과장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독립사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자

본래 영국과 사이가 나빴다?

미국 독립의 원인이 영국과의 갈등이라는 것은 세계사를 우리나라 고등 교육 때 받아봤다면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억압을 받았던 역사에 비추어 보아 당시 미국이 식민지였으므로 미국인들은 당연히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북미 식민지와 영국의 사이는 처음부터 파국으로 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국가에서 주도해 개척된 식민지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이나 영국 치하의 인도처럼 수탈이 자행되고 그 대우가 극히 나빴던 것과는 다르게, 미국은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이 자국민이 직접 이주해 개척한 자치령과 같았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당시 미국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한다는 조건으로 자체적인 의회나 주 정부를 구성하는 등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대중들이 독립을 바랐나?

처음부터 대중들이 독립을 원하지는 않았다. 자치권이 보장됐고 경제적으로 풍족했기에 영국의 정책 기조가 바뀌기 전까지는 큰 불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진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성장하던 미국의 경제에 족쇄를 채우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에 대한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1761년에는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국은 애초에 독립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미국이 영국의 일부라는 생각은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소책자 <상식(Common Sense)>을 내기 전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조차 반역은 입에도 내지 않았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연설로 유명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과거 인지세 관련 재판에서 “이것이 반역이라면 최대한 활용하자”고 발언했다고 알려진 것 역시 후대에 들어서 과장이 섞인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단결과 분열

일부 계층에서 혁명의 씨앗이 자리 잡았을 즈음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 발발했다. 이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역설적이게도 본국과 식민지가 단결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양측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7년간 진행된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지만 재정이 버거워진 것이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비용이 6,500만 파운드에 달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인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영국의 재정이 파탄 날 지경이었기에 영국은 1763년 미국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ts.) 서쪽으로 확장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수단인 서부로의 확장이 막히자 점차 대중에게 까지 반영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세금으로 달아오른 반영감정

이는 바로 다음해에 사탕조례(Sugar Act)를 제정한데 이어, 이듬해 1765년에 인지조례(Stamp Act)까지 통과돼 더욱 심화됐다. 특히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이도록 한 인지조례는 결정타로 작용했다. 기존 세금이 간접세였던 것과 달리 인지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는 인지세는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라 대중들이 보다 직접 느낄 수 있었기에 불만을 더 크게 했다.

미국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공헌한 것에 대한 보답이 이주제한과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발의 배경에는 체감하기 쉬운 세금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반대로 영국 측은 식민지인들이 전쟁에서 거의 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식민지인들은 자신의 권리에 도전을 받게 되자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유명한 말마따나 선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지자 북미 식민지의 상인들은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 없이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 폐지를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철폐됐지만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영국 의회는 조직적인 반발에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잇따라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타운센드 법안(Townshend Acts) 통과가 그 정점을 찍었다. 식민지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법안이 폐기됐지만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여기에 1770년 세금 반대 운동을 벌이던 보스턴 시민을 살해한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이 벌어지자 이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던 독립파들이 세력을 키우게 됐고,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자치령 폐기 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미국 측은 두 번에 걸친 대륙회의를 소집해 어떻게는 영국과 충돌을 지양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끝내 독립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세금에 대한 반발은 정당한가?

과세로 인한 부당한 처사로 전쟁이 벌어지게 됐는데 과연 세금이 부당했는가에 대해 반문하는 의견도 있다. 당시 영국 본국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많은 노동자들은 투표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굶어죽기 일수였다. 반면 미국 식민지인들은 투표권도 있었고 통계에 따르면 영국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보다 미국 식민지 사람들의 수입이 무려 20배나 높았다.

또 아메리카 대륙은 음식도 풍부해 기록에는 랍스타가 너무 많이 잡혀서 죄수들에게까지 물리게 배급되고, 하인들은 랍스타에 신물이 난 나머지 파업까지 벌여 ‘일주일에 세 번은 식탁에 빵을 올린다’는 합의를 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영국은 인지조례로 돈을 한 푼도 걷지 못했으며, 악명 높던 타운센드 법도 3년 동안 고작 265파운드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거기에다 보스턴 차 사건은 밀수업자들의 불법 행위였으며 보스턴 학살도 심리적으로 몰려있어 벌어진 우발적 사태로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 식민지인들은 눈뭉치를 영국군에게 던졌다고 한다.

영국군은 그날 밤 자신들의 몇 배나 되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조롱과 협박을 당했으며, 이에 당시 변호사였던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는 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 병사들을 기꺼이 변호했다. 기소자 중 두 명을 제외한 기소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도 엄지손가락에 낙인이 찍히는 정도의 형벌로 끝났을 정도였다.
 

신준호 기자shinister01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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