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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세상 이야기-정상회담 (2018-06-08)

북미정상회담 전 둘러보는 남북정상회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우려와 기대 속에 열린다. 열리기 전부터 롤러코스터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다행히 일정에 변화가 없이 6월 12일에 열리게 됐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과연 우리나라가 이전부터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지 알아보자.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이다

정치성향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정권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했지만 공식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총 4번 밖에 되지 않으며, 모든 회담이 정치적으로 진보세력이 득세했을 때 이루어 졌다. 그러나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인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로, 1984년 여름 큰 홍수로 인해 엄청난 수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북한이 수해복구 물자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 발표해 이를 수락하면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남북 예술단 상호 방문 공연과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돼 남북관계의 해빙기가 잠깐 도래하게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수해복구 물자 지원이 있던 바로 다음해인 1985년 9월 북한 대남정책 전담자였던 허담 대남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극비리에 전두환을 만났다. 북한의 남북정책을 전담하는 대남비서가 대통령을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북한에 장세동 안기부장을 비밀리에 방북시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했고 밀사들 간에 이뤄진 접촉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원칙적으로 합의를 이루게 됐다.

하지만 정상회담에 대한 의견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1986년이 되면서 다시 남북관계에는 긴장이 흐르게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금강산댐 수공설 등 북풍을 이용해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북한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키면서 북한과의 대화는 요원해져만 갔다.


김일성 사망으로 엎어져

문민정부 시절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하면서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 혹은 전면전에 대한 여론이 일면서 국제적인 위기감이 조성됐었다. 그러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중재에 나서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여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남북은 실무접촉을 이어가며 장소부터 일정, 의제, 경호, 숙식, 인원, 언론 취재 방식 등을 합의했지만 북한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이 연기가 돼 김영삼 정부 대에서는 남북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햇볕정책과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대북화해협력정책을 펼치면서 북한에 ‘남북 기본 합의서’ 이행과 지원을 약속하며 남북 정상 회담을 제안했다. 본래 2000년 4월에 장시 문화관광부 박지원 장관이 발표한 예정은 6월 12일부터 14일까지였지만 북한 측의 준비 미비로 하루 연기된 6월 13일부터 3일 간 회담이 진행됐다. 2000년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분단된지 55년 만에 처음으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원인 중 하나로 크게 작용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계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외교방침으로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을 이뤄낸다는 일명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우며 북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력했다. 노 전 대통령 임기 초 있었던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남북관계는 잠시 경색됐으나 이내 유화 국면으로 나가기 시작해 결국 2007년 10월 2일에서 10월 4일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원래는 2007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에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여 한 차례 연기해 개최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하여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4•25 문화회관 앞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노무현을 맞이했다. 일정 이틀째인 10월 3일 남북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회담을 가졌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한 ‘2007년 남북정상선언문’으로도 불리는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채택했다.

양국 정상은 선언문에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할 것과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을 합의했다. 특히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후속 회담으로 같은 해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남북 총리회담이 열렸고, 12월 11일에는 문산∼한문 역을 운행하는 개성공단 화물열차가 개통됐다. 


물밑에서 작업

이명박 정부에서는 2009년 3차 남북정상회담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임태희 국회의원을 싱가포르로 보냈고 북한의 노동당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이 비밀회동은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 임태희는 김양건과의 비밀 회동을 시인했다. 2011년에는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등이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회동해 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 때는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황병서, 최룡해 등이 방남하면서 가능성이 생기기도 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2015년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한 적이 있었는데, 박근혜의 밀명을 받은 한 친박 전직 의원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측과 접촉해 일정을 조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양건이 2015년 12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 북측이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이러한 논의는 중단됐다.


두 차례 연달아 열린 정상회담

작년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헌정사 최초로 두 차례 이상 북한과 정상회담을 가진 대통령이 됐다. 원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초 남북 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했었다. 북한은 꾸준히 미사일을 날리고 핵실험을 강행하며 계속해서 도발을 해왔고 미국의 북한 선제 타격설, 한반도 전쟁설 등이 불거졌었다. 그러다 2018년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북한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의 김영남과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등 북측 고위급 인사들이 방남했다. 김여정은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로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할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며 김정은의 방북 요청을 구두로 전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그것도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은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은 4월 27일 최초로 우리나라 땅에서 개최됐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회담을 통해 합의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통해 비핵화 논의와 종전선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성 설치, 이산가족 상봉 등을 목표로 밝혔다.

그리고 북한 측의 도발적 언사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서면으로 북미회담 취소 의사를 비치자 5월 26일, 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한 달 만에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비밀리에 회담이 예보 없이 진행됐다. 남북 정상은 이 회담에서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성공을 위한 긴밀한 협력과 4•27 판문점 선언의 조속한 이행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한편 이와 맞물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6•12 싱가포르 회담에 대해 검토했으며 재추진을 검토했다.
 

신준호 기자shinister01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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