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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것들을 비우며

  • (2017-12-29 10:11)

어느덧 한 해가 또다시 사그라지고 새해가 밝아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일출과 함께 청량한 새벽공기를 마시기도 전에 새로 포장된 길바닥에 발린 타르가 신발에 늘러 붙은 것 마냥 끈적거리는 불쾌감과 작년에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난다.

풀지 못한 시험 문제는 항상 답지를 내면 답이 떠오르듯 끝물이 되면, 끝나고 나면 항상 ‘그 때는 저랬어야지’, ‘저 때는 그랬어야지’하고 명답이 떠오르지만 어찌하랴, 이제와선 후회 섞인 한숨만이 그득하게 좁은 방안을 메운다. 한숨으로 뱉은 이산화탄소가 들이 마신 숨보다 많아 행여 질식할세라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무서워질 정도다.

그렇게 연말에 앉아서 궁상을 떨다가도 막상 새해가 되면 마법과도 같이 작년에 왜, 그리고 어떻게 실수했는지도 잊고 들뜬 마음으로 새해계획을 세우는 자신이 수조 속 관상어보다 뭐가 더 잘났나 싶다. 심지어 맥주병인 나에 비해 물속에서 저 주둥아리를 뻐끔거리는 물고기는 헤엄까지 잘 치지 않는가라는 쓸 때 없는 질투심마저 든다.

언젠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연말에 한 해 동안 있었던 문제점과 드러난 약점, 무엇을 잘했는지 분석하고 새로운 한해의 목표를 2시간 남짓한 시간에 걸쳐 종이 위에 샤프로 꾹꾹 눌러 새기고 볼펜으로 깔끔하게 선을 깎은 뒤 지우개로 다듬어 아름답게 책상 위에 붙여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해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책과 프린트, 잡동사니들에 묻혀 어느새 책상위에 그런 어여쁜 창조물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대청소를 할 때가 돼서야 이마를 탁 치며 아차하게 됐다.

올해에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서적들을 뒤적이고 싫어하던 자기개발서 코너도 12월 들어서 더 자주 둘러보게 됐다. 당연하게도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하는 저자가 많았다. 그리고는 요새 내가 목표를 시작할 때 적어 놓기만 했지 정작 달성을 위해 실행해야 하는 매일 적고 상기하는 작업은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적으로 가장 시간 관리에 공을 들여야만 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얇은 노트에 자신의 모든 행동을 시간과 함께 적어놓는 한 친구가 있었다. 예를 들어 5:15~5:45 석식, 5:45~5:56교사로 이동, 5:56~6:00 잠깐 휴식, 6:00~6:50 수학공부 ...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친구는 잠이 많고 방학 때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한다거나 지각 직전에 교실에 들어오거나 늦게 들어오는 등 일반적인 사람이 볼 때 시간 관리하고는 거리가 꽤 있었던 친구였다. 지금은 소름 돋을 정도로 기록을 열심히 해서인지 꽤나 나아진 것 같다.

당시 나는 그 친구가 터무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호기심이 생겨 어떤 이유로 그러한 귀찮고 힘든 작업을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 한 권을 소개해 줬는데, 내용은 구소련 과학자 류비셰프가 철저한 시간관리를 했다는 내용의 책이었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책이었다. 그 책에서 류비셰프가 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정리한 ‘시간 통계’였다. 그것을 감명 깊게 받아들인 그 이상한 친구는 그 작업을 류비셰프처럼 완벽하게는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잘하는 것 같으면 따라하고 싶어지는 고등학교 3학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나도 한동안 그 친구처럼 시간 관리를 했었다. 미래의 자신이 보면 부끄럽게 될 만한 일들은 되도록 적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워 넣었다. 그렇게 얼마간 관리를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미래의 자신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어 못하게 될 때란 한 여름에 물 없이 운동장 한가운데서 축구를 하루 종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만큼 효과가 있었다. 원하던 하루 단기 목표와 한 달 중기 목표, 한 분기 간의 중장기 목표는 대부분 달성했다.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보이는 손때를 탄 브로슈어 크기의 다이어리는 아직도 그 친구가 그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그 친구라고 모든 하루를 고3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완벽하게 채워 넣으려하진 않았기에 그 기행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새해맞이를 준비하는 어느 날, 감미로운 책내음을 애써 무시하고 2018년 새해맞이 코너에서 다이어리를 손에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올해야 말로 신경 쓰이고 걸리적거렸던 나쁜 습관은 버리고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정진하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비싸고 작고 튼튼한 다이어리 하나를 책 두 권 대신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지난해는 비우고 새로운 기록과 습관을 그 안에 채워 넣기를 기대하면서. 기록의 힘이 한 해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하리라는 희망과 함께 해묵은 고쳐야할 점들과 단점을 적어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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