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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이끈 3대 거장

  • (2017-10-27 13:42)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뜻한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전통과 학문들이 다시 부흥하면서 기존의 문화에서 혁신을 일으킨 시기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다. 르네상스는 무언가를 다시 일으킨다는 뜻에서 현대에도 쓰이는 말이다. 이탈리아 전반에 걸쳐 프랑스•독일•영국 등의 북유럽 지역으로 전파되며 새로운 문화를 낳았다.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르네상스의 예술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3명의 거장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큰 업적을 남겼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완벽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학, 과학, 기술, 회화, 건축•토목, 조각, 음악, 문학, 역사, 요리 등 다방면에 거친 재능을 가졌다. 그의 천재성은 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포크와 긴 스파게티 면을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키가 194cm에 매우 잘생겼다는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외모 역시 출중했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인물을 그릴 때 먼저 대상의 성격과 본성을 따졌다. 신분부터 성격, 행동양식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는 장소에서 그들의 얼굴, 행동, 옷,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필요하다면 스케치까지 했다. 이것을 아주 많이, 여러 번 반복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설화에 따르면 오스만의 메호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 스케치를 계속해서 다시 그리는 바람에 그 제작 기간에 질려서 메호메트 2세가 그가 그린 초상화를 포기했다고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작품과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명성을 대변해 주는 작품은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다.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 시대에 정리된 원근법을 여실히 보여주며 <모나리자>는 ‘백만 불짜리 미소’로 매우 잘 알려진 작품이다. 제목의 ‘모나’는 이탈리아의 결혼한 여성의 존칭이다. <모나리자>는 세상에 단 하나인 작품이 아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외에도 <아이즐워스의 모나리자>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2013년 확인됐다. <아이즐워스의 모나리자>는 모나리자 재단의 검증을 거쳐 진품으로 확인됐으며, 기존에 알려진 모나리자보다 더 젊고 눈썹도 그려져 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가는 곳 마다 말썽인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르네상스 시대를 뒤흔든 거장 중 90세까지 최장수 예술가다. 몰락 귀족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기를 바라지 않았다. 당시 예술가의 취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의 반대로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맞거나 혼났지만 결국에는 허락을 받아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조각품들은 언뜻 보면 알기 어렵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비례나 근육의 크기, 자세 등에 문제가 있다. 직접 해부를 하며 인체에 대해 정통한 만큼 실수가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극적인 과장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비드 상> 역시 머리가 크다. 원래 <다비드 상>이 돔 천정 아래에 올라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한 것이다.

▷ 미켈란젤로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대표적인 작품은 <피에타>, <다비드 상>, <시스티나 천장화>,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시스티나 천장화>는 유명한 <천지창조>가 포함된 거대한 회화작품이다. 작품 곳곳에서 그의 성격이 묻어나온다. <피에타>에는 성녀의 옷자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거나, <최후의 심판>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수문장인 미누스의 얼굴에 그리기도 했다.


▷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그는 주변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고 다툼이 많았다. 이러한 성격 탓에 다른 동시대 거장들과의 관계는 단연 좋지 못했다. 레오나르도와는 라이벌 관계로 대선배 격인 레오나르도에게 미켈란젤로는 도전자로 항상 부딪쳐왔다. <다비드 상>의 조각을 미켈란젤로가 맡은 일에 대해 레오나르도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벽화 대결까지 할 정도로 자주 경쟁했다. 피렌체 베키오 궁전 벽화를 두고 벌인 대결은 안타깝게도 완성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화려한 라파엘로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미남에다 그의 성격은 모난 데가 없어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높은 신분인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 추기경 자리까지 추천받기도 했다. 그러나 추기경 자리에 추천 받은 것과는 다르게 여자를 밝혔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사 열전>에서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열병을 초래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절제하지 않고 연애에 몰두했다”고 적었다.

▷ 라파엘로<자화상>

 

그의 작품은 피렌체에 머물던 기간 동안 다른 르네상스 거장의 영향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서는 효과적인 빛의 사용과 부드러운 색조 변화 등으로 입체감을 주는 스푸마토 기법 등을 익혔다. 대게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의뢰로 그려졌다. 교황의 부름으로 로마로 간 그는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많은 작품을 그려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중에는 교회의 요청으로 성화가 많이 있었는데, 다수의 작품에서 자신과 12년 동안 동거한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성을 성모 마리아 모델로 삼았다고 추정된다.

▷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는 37세의 독신으로 죽었다. 그 이유는 높은 신분의 여성과의 결혼 주선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제안을 거부하고 미천한 신분의 여자와는 결혼할 수도 없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결혼 약속은 잡아놓고도 미혼으로 버텼다. 대표작으로는 <아테네 학당>과 <그리스도의 변모>가 있다. <아테네 학당>에서는 플라톤의 얼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그려 존경을 보였고 자신을 교황의 수행원으로 그려 넣었다. <아테네 학당>은 많은 스케치를 거쳐서 완성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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