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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먹던 밤 (2017-10-20 10:04)

나는 밤을 좋아한다. 가을이 되면 유독 밤이 먹고 싶어진다. 추석만 되면 시골에 내려가 리어카에 사촌동생을 싣고 밤나무에서 떨어진 뾰족뾰족한 밤송이의 틈을 벌려 알밤을 주우러 가던 일이 기억난다. 그렇게 고생해서 주워온 밤을 삶아 수저로 파먹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저녁이 되곤 했다.

왠지 모르지만 밤을 항상 삶아먹었다. 구워먹지도 않았다. 아버지 혼자 드실 때는 귀찮으신지 생밤을 깎아 드셨지만 같이 먹을 때는 솥에 넣고 삶아먹었다. 크기가 일정하지도 않았고, 맛도 제각각이었다. 애들이 주워온 터라 덜 익은 것도 있었고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당연히 맛이 떨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가끔은 벌레 먹은 밤도 있어서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고 단단한 껍질에 틈이라도 벌어졌는지 물이 차 있던 것도 있었다.

이번 추석에는 밤을 주우러 갈 새가 없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동생도 별로 밤 생각이 없는 듯 바닥에서 밍기적거리거나 지나간 세상이야기를 보려는지 시퍼런 액정만 뚫어져라 보았다.

나 역시 주변에 밤나무가 통 보이질 않아 밤 먹을 생각은 일찍부터 접었다. 보통은 설익었더라도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가 있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연휴동안 밤 한 톨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와 편의점에 들렀다. 거기서 2+1 행사 중인 가공된 군밤을 보고는 바로 6개를 집었다. 우악스럽게 봉투를 뜯고 밤알을 입에 넣고 굴리기도 하고 씹기도 하고 혀로 으깨보기도 했다. 시중에서 파는 것이라 벌레 먹은 것도 없어 맛이 좋았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던 느낌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평소 가족끼리 둘러 앉아 먹을 때는 거의 반 솥을 혼자 해치웠지만 그날따라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단단한 껍질을 이빨이나 칼로 가를 필요도 없는 노랗고 쭈글쭈글한 딱딱한 밤들을 한동안 멍하니 본 것 같다. 작은 창을 보니 벌써 해는 떨어져 어느덧 저녁이었다. 밥을 먹자니 이전까지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난 반찬들이 떠오르며 별로 다른 것들이 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남은 밤알을 입에 우겨넣고 양치하고 오랜만에 일찍 누웠다.

스스로 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왜 밤을 좋아하게 됐나를 떠올려봤다.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닌데.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시 양치하기는 귀찮지만 배고파서 못 자는 것보다는 나을까 싶어 다른 밤이 든 봉투를 깠다.

아버지 생각이 잠깐 났다. 여러모로 늙지 않는, 내겐 머릿속 어딘가에 피터팬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밤을 좋아한다. 집에서 밤을 삶는 것은 대부분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밤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맛있는 밤을 먹을 때는 항상 노나주지 않고 혼자 까먹었다.

어릴적 나는 아버지가 무언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 맛있는 밤만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나 동생들이 썩거나 벌레가 주인으로 자리 잡은 밤톨을 고를 때 아버지는 항상 맛있고 알찬 밤만 골라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어떻게 자기만 맛있는 거 따로 챙겨먹을 수 있냐며 따지면 놀리는 말투로 벌레 먹은 밤이 제일 맛있는 거라고 실실 웃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나도 동생이 썩은 밤을 집으면 내심 즐거워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기억과 함께 씹어 삼키는데 문득 집으로 돌아가기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동생이 밤 먹다 벌레 씹는 것을 보고 싶어졌다. 그 고소한 맛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아마 내가 밤을 먹고 싶은 것은 맛이 아니라 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라 그런지 감수성을 한껏 발휘하는 내 마음이 먹고 싶은 듯하다. 아마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제서야 딱히 밤 맛을 좋아하던 것이 아니라 가족끼리 둘러앉아서 밤을 까먹는 그 분위기의 맛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밤을 먹으면서 있었던 추억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자 어느새 한 봉지가 증발했다. 멀리 타향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을 수 있다. 추석 때 한 번 봤더라도 그러한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 내밀기도 한다. 아마 밤을 먹으면서 그런 마음을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일이 있어 서울로 잠깐 올라오신다는 전화를 받았다. 만나면 밤이라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야겠다. 언제 오시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목요일이라 하시고 어머니는 금요일이라고 하신다. 언제까지 아들을 골려먹을 심산인지 오시는 날도 모르게 들이닥친다니 갑자기 가족이 그리운 마음이 픽하고 사그라드는 것 같다.

그래도 얼굴 마주하고 밤이나 까먹으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제대로 된 밤 먹을 생각에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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