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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을 뻔 했던 날

  • (2017-06-16 00:00)

진리나 법칙은 누구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깨닫게 된다. 욕조에 몸을 담그다 물이 넘치는 것을 본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하고 소리쳤던 것도,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일화도 모두 우연에서 비롯됐다. 어떤 사람이든 세상의 이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다.    

여름이 봄의 문턱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모든 일들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잘 풀리던 적이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대번에 눈을 뜨기 힘들어 여러 개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 소리도 그날은 한 번 밖에 울리지 않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피아노 연주로 스트레스를 줬던 옆집 꼬마 녀석의 연주도 그날따라 몹시도 아름다운 선율로 다가왔다. 그림인줄로만 알았던 침대보의 이름 모를 그 꽃도 하루 새 부쩍 자란 것 같다는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분명 그날은 보통날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외출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섰을 때도 순천만의 갈대밭처럼 잘 다듬어진 머리칼과 박달나무처럼 튼튼한 팔뚝이 그날따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참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지만, 스스로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 같아 서둘러 집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몇 정거장이 지나자 버스 안은 금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혼잡한 인파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문득 거울 앞에서 자아도취에 빠졌던 모습이 떠올랐고, 드디어 그 모습들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에 남몰래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을 조심스레 따라가 보니 또래의 여성들이 보였다. 역시나 그들의 시선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알 수 없는 대화를 연신 주고받더니 손뼉까지 치면서 뻥긋뻥긋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들이 보내온 건 미소가 아니라 조소(嘲笑)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우연히 휴대폰에 비친 얼굴에는 도무지 사연을 알 수 없는 밥풀만한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코를 풀다가 남긴, 그날만큼은 흔적이 아닌 상흔이었다.

그들이 손뼉까지 치면서 미소를 지었던 것은 우스꽝스럽게 달라붙어 있던 그 휴지조각 때문이었다. ‘밥풀인척하고 입으로 쑤셔 넣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건 마당질 뒤의 쌀자루처럼 묵묵히 침묵만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버스에서의 일은 웃지 못 할 해프닝으로 마무리 됐지만 분명 휴지조각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과 후의 기분은 극명하게 달랐다. 마치 첫사랑을 잃은 기분이었다. 사나운 팔자는 불에도 타지 않는다는 말에 격하게 수긍을 했던 날이기도 하지만 그날의 망신살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게 했다.

억지로 끌어 붙여 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부끄러움과 함께 터득한 이치는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주변의 환경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주변의 환경도 긍정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착각의 울타리 속에서 살자는 야멸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휴지가 붙었다는 사실에 대해 귀띔을 해주지 않은 여성들이 너무나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여성들이 호감을 갖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은 사소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훗날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실망감이 지금보다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의식을 갖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일의 결과가 좋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더라도 우쭐대기보다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실수하고 결례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갖는 착각 속에서 빠져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신이 갖는 생각이 주변의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思考)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이 됐든 감정을 나누는 일이 됐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보고 느꼈던 감정들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다시는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혼자 착각하고 야릇한 상상을 하기보다는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의 조언과 의견을 듣기로 했다. 타인의 말 한 마디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정들을 알게 되거나 혹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말 한 마디로 송두리째 바뀌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나를 배제하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남을 존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버스를 타면, 그리고 난데없이 또래의 여성들이 뜨거운 시선을 보낼 때면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얼굴을 비출 수 있는 물건을 꺼내보게 된다.

 

두영준 기자mknews@m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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