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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늙고 싶다

  • (2016-07-01 00:00)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십 대 때에도 자주 깜박거렸던 것 같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며 수다를 떨다가(당시에는 삐삐세대였다) 지갑을 놓고 오기 일쑤였고, 쇼핑을 하고 꾸러미를 분명히 들고 밖으로 나왔는데 어느 순간 살펴보면 내 손은 휑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공수업시간이어서 강의실로 들어갔는데, 칠판에는 오늘은 휴강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친구에게 당장 전화해 왜 나만 모르는 일인지에 대해 따져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때 너 수업 시간에 같이 안 있었니?”였다.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전 수업시간에 교수의 개인적 일로 다음 시간에는 휴강 한다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애꿎은 친구만 타박했던 것이다.

사실 이럴 경우에는 제일 기가막힌건 친구도 아니요, 부모님도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죄 없는 가슴만 팍팍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미친 여자처럼 마구 파헤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학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내 몸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흘러도 건망증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됐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점점 건망증이 무섭게 느껴질 즈음, 주말에 한 편의 영화를 봤다. 속에 있던 묵은 감정들을 희석하고, 대리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뻔한 로맨스였지만, 여주인공이 앓는 병명이 매우 특이하다는 점과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눈물을 쏟게 한 영화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나는 스물 셋이었다 여주인공의 나이도 이십 대였다. 한창 예쁠 나이에 알츠하이머라는 몹쓸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기억을 차츰 잃어간다.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감당하고 끝까지 데리고 살아간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뻔한 로맨스에,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걸 다시 보니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휴지로 코까지 풀어가면서 나는 이 영화에 매료됐다. 내가 눈물을 흘리게 된 데에는 여주인공과 남자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그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남자에게 한 말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슬프지만, 아름답게 대처했다는 것에 있다. 그녀는 남자가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용서는 미움의 방 한 칸만 내어주면 되는 거래. 가족이잖아라고 했고, 남자는 여자의 충고를 따뜻하게 받아들여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용서한다.

여자는 알츠하이머가 심해진다고 느낄 무렵 온전히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건망증으로 당신을 만났고, 그 건망증 때문에 당신을 떠나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찾지 마세요.”

편지 한 장만 테이블에 달랑 남긴 채 홀로 떠난 여자는 요양원에서 지낸다. 여주인공이 예쁜 배우 손예진이라는 것 때문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는 참 아름답게 늙어간다(정신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내게 저런 상황이 닥친다면 우아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 일 뿐이다. 만일 이것이 현실이면, 끔찍할 것이다. 마침 남편은 나의 그런 꼴을 목격하곤 한 마디를 던졌다. “정신 차려라~!”.

인간은 늙게 마련이다. 몸이 늙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머리가 먼저 늙어 알츠하이머가 찾아온다면 속수무책이다.

어릴 적 친할머니는 비교적 빨리 치매가 찾아왔다. 방학을 맞이해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댁을 방문했는데, 할머니는 병이 심해진 탓인지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도 젊은 시절 건망증이 심했다고 했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시집을 빨리 갔고,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나돌았고, 마음을 둘 곳이 없던 할머니는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 뇌가 먼저 죽기 시작했다.

그날 밤 아버지와 나, 할머니는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청했다. 한참 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있으니 울음소리가 더 격해져 있었다. 시골의 한적하고도 적막이 흐르는 캄캄한 밤에 울음소리가 들리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를 깨우려고 얼굴을 돌렸는데, 다름 아닌 아버지가 울고 계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핏줄이 다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할머니의 늙은 손을 꼭 잡고 계셨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며 나는 깨달았다. 늙는다는 것. 그것은 결코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일 뿐이라고.

 

문혜원 기자mknews@m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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